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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헌의 독서파크(97)]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김 헌'

기사승인 2022.01.20  23:4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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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패미리병원 해헌(海軒) 강일송 병원장

 김헌 작가의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사진제공=해헌 강일송)

 이번 이야기는 인문학 중 예술의 본질을 논하는 글을 한 번 보도록 한다.

 저자는 김헌 교수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고전 열풍을 이끈 명교수라고 한다.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한 후 같은 대학철학과 대학원에서 플라톤 연구로 석사학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고전학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오늘은 그의 책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내용 중 미메시스(모방)와 예술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본다. <해헌(海軒) 주>

 [시작하며]

 통일신라시대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화가 솔거는 어찌나 그림을 잘 그렸던지,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새가 날아와 부딪혔다고 한다. 새들까지 감쪽같이 속이는 그의 솜씨는 최고의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솔거가 살던 때보다 약 1200년 전(기원전 약 5세기경), 아테네에 제욱시스라는 화가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포도송이를 담아 운반하는 소년을 그렸는데, 그 포도송이에 날아가던 새들이 달려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한 수 위의 화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파라시오스였다. 참새의 죽음으로 한껏 우쭐해진 제욱시스가 파라시오스에게 "이젠 그대의 그림을 보여줄 차례네"라며 그림을 가리고 있던 베일을 걷으려고 했다.

 그 순간 깜짝 놀랐는데, 그가 걷으려고 했던 베일이 바로 파라시오스의 그림이었기 때문이었다. 제욱시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며 "나는 새를 속였지만, 파라시오스는 나 제욱시를 속였구나".

 화가의 손놀림을 따라 형태가 그려지고 색이 입혀지면서 세상의 한 조각이 화폭 위로 옮겨 오는 일은 신비롭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미메시스(mimesis)'라고 했다.

 이를 우리말로는 흔히 '모방'이라 하고, 서구에서는 '이미테이션(imitation)'이라고 번역한다.

 화폭 위의 그림은 화폭바깥의 포도를 흉내내고 모방한 이미테이션이며 미메시스의 결과다. 아무리 진짜같이 보여도 끝내 가짜포도일 수 밖에 없다.

 미메시스란 진짜를 원본으로 삼아 진짜처럼 보이는 가짜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종은 속임수가 들어가야만 한다.

 뛰어난 미메시스는 일종의 감쪽같은 사기행각이다. 그림 뿐만이 아니다.

 조각도, 음악도, 시도, 모든 예술은 실재의 대상과 현실을 가상의 공간으로 옮겨놓는 미메시스일 수 밖에 없고, 그 때 예술은 착각과 혼동을 일으키는 절묘한 기술이 된다.

 플라톤은 미메시스를 못마땅하게 보는 시각을 가졌는데, 그는 진정한 원본, 순수한 형상인 이데아(idea)를 추구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이 삶을 통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 것은 자신의 영혼을 육체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감각의 간섭에서 벗어나 오로지 이성을 통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참모습, 본질의 이데아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가>의 대화편에서 그림과 조각을 포함한 예술적 미메시스를 모두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플라톤에게서 쫓겨난 예술가들은 인도주의적 국가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에서 따뜻하게 받아들여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달리 미메시스의 가치를 높이 샀다.

 미메시스를 한다는 것, 그리고 미메시스 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고, 미메시스를 통해 학습을 시작한다는 사실에서 동물과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미메시스는 인간이 세상을 배워나가는 인간고유의 학습법인 것이다.

 미메시스는 일종의 선별과 선택의 작업이다. 예술적인 미메시스란, 차이와 거리의 필터를 이용해 무언가를 걸러내 버리고 특정한 무언가를 뽑아내 화폭 위에 응집시키는 정제와 정화의 작업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을 취사선택하는 것일까?.

 화가는 대상으로부터 '그 것을, 그 것이게 만드는 것', 즉 대상의 본질을 뽑아내 화폭에 끌어온다. 이 때 미메시스는 모방이나 이미테이션의 의미를 넘어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제대상과 그림사이의 거리를 왜곡의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 미메시스를 왜곡과 속임수로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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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미메시스의 원리 속에서 예술적 모방과 재현의 본질을 밝힌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림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림을 추론해 대상 자체로 건너간다. 따라서 그림을 보는 사람은 미학의 시각적이며 감각적인 즐거움 이 외에도 무언가 중요한 것을 배우는 인식론의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믿음은 예술적 본질을 미메시스로 정의하는 서구다운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모방이든, 재현이든, 미메시스는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으로만 값어치가 매겨질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모든 존재하는 것에 변하지 않는 본질따위는 없다는 믿음이 생긴다면, 미메시스의 서구다운 전통은 해체되고 예술적 창작을 위한 재구축의 길을 모색해야만 하는 것일까?.

 [마치며]

 오늘은 서울대에서 서양인문학 강의로 이름 높은 김헌 교수의 책을 한 권 보았다. 미메시스와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의 큰 축은 플라톤과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데아, 즉 사물의 본질을 극도로 추구한 플라톤은 예술이라는 것이 단순히 본질을 가짜로 그려낸 짝퉁으로 생각한다.

 플라톤에게서는 예술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생각을 가진다. 세상을 배우는 학습을 미메시스라고 본 것이다. 거기다가 사물의 본질을 취사 선택하여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 예술의 의미를 완성한다.

 진짜 사과보다 세잔의 풍경 속 사과가 그려진 그림에 대해 현대인들이 매기는 가치는 비교가 불가하다.

 처음에 예술, 특히 미술을 본다면 원본에 가깝게 그리는 것이 예술이었겠지만 사진이 나오면서 미술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어떤 훌륭한 미술가도 사진만큼 사실적으로 그릴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은 또 다시 방향을 새로이 잡고 나아간다.

 인간의 본질,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면 꼭 아름답거나 비례가 맞거나 예쁘지 않아도 예술이 된 것이다.

 특히 현대미술은 보면 지극히 난해하다. 사물이 해체되어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힘들고, 통조림 예술이라고 하기도 하고 만화를 옮겨와 작품으로 만든다. 

 화장실 변기를 아예 떼어와 작품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모두 예술로 인정받고 있다.

 서양의 예술론은 미메시스를 시작으로 발전하였고, 그 토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닦아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본래 사물에 과거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본질자체가 존재치 않는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예술의 기초 토대는 무너지고 말 것이며 예술론 자체가 새로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 기회에 다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다.

 <강사소개>

 해헌(海軒) 강일송

 현 양산 물금증산의 양산세무서 6층과 7층 서울패미리병원의 병원장,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한림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최고지도자 과정(AFP) 수료.

 <저서> ▶우리아이 성조숙증 거뜬히 이겨내기, ▶우리아이 변비와 야뇨증 거뜬히 이겨내기, ▶초보 육아 거뜬히 이겨내기, ▶더바이블 육아 소아과 수업 3권 시리즈.

 <※해헌의 독서파크는 사전에 작성된 원고로, 현재 시기와 변화된 내용이 포함돼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양산뉴스파크 webmaster@ysnewsp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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