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패미리병원 해헌(海軒) 강일송 병원장
빌리 엔·오르바르 뢰프그렌 저자의 '기다림과 권력'.(사진제공=해헌 강일송) |
오늘은 우리가 일상에서 가지는 사소하고 하찮은 순간들에 대한 인문학적 탐구가 돋보이는 책을 한 권 보려고 한다.
저자는 스웨덴인으로 우메아대학교에서 문화 및 미디어 연구학을 가르치는 유명한 학자이자 교수이다.
생산성에 목을 매고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대한 의미를 성찰한 독특한 학자이다.
이번 이야기는 그의 저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 중 기다림과 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해헌(海軒) 주>
[시작하며]
# '애태우기'
권력과 예속, 다시 말해 남을 기다리게 하는 입장과 기다려야 하는 입장.
모든 인간관계가 이 두 가지 입장을 포함한다.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시간과 사회적 지위가 나의 그 것보다 귀중하고 높다는 의미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은 우월함을 표현하는 매우 간단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지원자, 고객, 세입자처럼 예속적인 입장의 사람들은 공공관서 복도에서 보잘것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 상기하게 된다.
단순히 문이 열리길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황 하나에도 권력관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일부 사무실에서 '부재중, 기다리시오, 들어오시오'를 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시스템 역시 권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누가 더 기다리는가'
힘 있고 중요한 사람일 수록 다른 이의 접근을 통제할 권한도 많이 갖는다. 권력가를 만나려면 반드시 사전에 약속을 해야 하는 반면, 약자는 언제 어디서든 만날 수 있다.
건물 1층은 보통 말단직원들이 데스크에 앉아 고객을 맞이한다. 층수가 올라갈수록 접근성이 떨어진다.
강자는 약자의 기다리는 시간을 연장함으로써 단지 자신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길 원한다. 반대로 약자는 상대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기다리길 자처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관계에 대한 열망이 더 강한 쪽이 상대를 더 오래 기꺼이 기다린다.
기술자와 고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못 미더운' 일꾼과 성난고객의 관계 역시 힘겨루기 싸움에 속한다. 기술을 파는 기술자들은 비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고객을 줄 세우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기술자들은 고객의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바꾼다.
# '기다림에 대처하는 자세'
기다리는 입장에서 기다림은 수치스러울 수 있다. 이를 바꾸는 방법은 전혀 기다리지 않는 척하는 것이다. 남에게 휘둘리는 입장에 놓인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다른 활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덮어버린다.
이는 그에게 어느 정도 그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다는 기분을 스스로에게 선사한다. 이를테면 팔짱을 끼고 무심한 듯 기다린다든지 말이다.
배고픈 식당손님들은 그래서 필사적으로 메뉴판을 되풀이해서 읽거나 잡담을 나눈다.
# '기다림에 담긴 모순'
기다림은 감정 뿐 아니라 신체반응도 함께 야기한다. 몸을 꼼지락 거리거나 안절부절 못하거나, 마비가 된 듯이 꼼짝않게 되는 식이다.
기다림은 거의 평생에 걸친 학습과 망각을 통해 내면화한다. 즉, '인내는 중요하다', '시간은 돈이다', '기다려야 유리하다' 등등 이런 윤리구호를 통해 참을성과 조바심의 필요성을 배운다.
기다림은 대개 반감을 느끼게 하고 부정적인 기분을 들게 하는 경우가 많지만, 예외가 있다. 앞일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열렬히 기다리는 상황이 주는 즐거움은 현재를 장밋빛으로 물들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연애나 출산, 여행 등이 있다.
아울러 기다리는 동안에는 주변의 세상을, 곁에 있는 낯선 이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기다림은 지루함의 원인인 동시에 놀라운 통찰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마치며]
'기다림'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인문학적, 철학적 통찰이 가득한 글을 보았다. 저자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순간에 관심을 가지고 그 시간들에 대한 의미를 사유한다.
현대는 분초를 다투는 일상을 가지고 있지만, 저자는 역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순간들에 대한 역할과 의미를 펼쳐낸다.
기다림과 권력과의 관계에 대한 통찰은 참으로 명쾌하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는 것이 권력의 하나의 표현이라는 것은 돌이켜 보면 아주 알맞은 지적이다.
그리고 기술을 가진 기술자들도 하나의 권력자가 되어 고객들을 줄세운다. 요즘 우리사회에서는 갑을 관계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갑을 관계가 대표적인 권력을 가진 자와 아닌 자와의 관계를 대변하는 전형일 것이고,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저자가 말한 기다림의 권력관계가 나타난다.
반면 좋은 사람을 만난다든지, 여행을 떠날 계획을 한다든지, 아기를 출산할 예정인 경우는 밝고 환한, 즐거운 기다림이다.
또한 기다림이 지루한 일이 되기도 하지만, 평소 발견하지 못했던 소소한 부분들을 바라보게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는 새로움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읽고 보니, 단순한 '기다림'에도 참 많은 의미와 생각거리가 있다.
매일 매일 좋은 '기다림', 행복한 '기다림'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강사소개>
해헌(海軒) 강일송
현 양산 물금증산의 양산세무서 6층과 7층 서울패미리병원의 병원장,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한림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최고지도자 과정(AFP) 수료,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서울대학교병원 의료경영최고위 과정(AHP) 수료, 한국예술종합학교 최고경영자 문화예술과정(CAP) 수료.
<공동저서> ▶우리아이 성조숙증 거뜬히 이겨내기, ▶우리아이 변비와 야뇨증 거뜬히 이겨내기, ▶초보 육아 거뜬히 이겨내기, ▶더바이블 육아 소아과 수업 3권 시리즈.
<※해헌의 독서파크는 사전에 작성된 원고로, 현재 시기와 변화된 내용이 포함돼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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